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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화이트헤드에 대한 비판이해와 진정한 넘기..
[ 2005-12-03 10:59:43 ]
글쓴이  
이선이
조회수: 4017        
무릇 모든 비판에는 정당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정당한 이해 없는 비판은 늘상 핀트가 어긋날 따름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어떤 분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분의 화이트헤드에 대한 이해와 시각이 매우 특별나지 않을 수 없어서 소개하는 바이다..
전체적으로 화이트헤드를 무지 싫어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솔직히 나는 이 분이 화이트헤드를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첫째, 화이트헤드 사상은 거시적으로는 조화와 일치를 강조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역사의 모순이나 대립, 갈등을 얘기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다고 본다는 점이다..

물론 화이트헤드 사상을 얼핏 보기에는 조화와 일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조화와 일치는 아무런 모순이나 갈등 대립마저
사상한 채로 추구되는 그러한 조화와 일치를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인가?
그런 게 정말 화이트헤드에 있었던가?
많은 화이트헤디안들이 정말 이에 동의할지 나로서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조화와 일치의 구도는
유일한 합리성의 척도인 신God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질서 구현의 궁극적 소스이기도 하다..

반면에 화이트헤드에게서 사물의 부조화와 불일치는 악의 사태에 해당한다..
조화와 일치가 아닌 불일치, 대립, 갈등은 악이라는 사태를 빚는다..
그런데 이 대립과 갈등이 사회학적인 것-예컨대 계급 모순이나 갈등-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엄밀하게 따질 경우 존재론적 지평과는 논의의 지평이 다르다..

설사 논의의 지평이 같은 존재론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화이트헤드가 궁극적으로 의미를 둔 것은 조화나 일치 보다
나는 오히려 <모험>에 있다고 본다.. 그 자신은 그의 대화록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생의 의미는 <모험>adventure”이라고..
무엇보다 그의 언급처럼 우리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소란스러운 세계 속에 살고 있다..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질서와 조화라고 하지만 이때 화이트헤드에게서
그 어떤 질서의 구현은 분명하게도 세계 안의 대립과 갈등들로 나타나는 시행착오들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화이트헤드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무런 배경 없이 나온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문명의 획기적인 진보는 -어린아이가 손에 쥔 화살처럼- 그 진보를 낳은 사회를 거의 해체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사회적 지혜의 첫걸음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존속시키는 방법은 첫째로 <상징적 법전>symbolic code을 보존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 법전이 계몽된 이성을 충족시키는 그런 목적들에 언제나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필요할 경우 주저 없이 그 법전을 <개정>revision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상징들을 존중함과 동시에 그것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없는 사회는 무정부상태가 원인이 되었든 아니면 무익한 환영과 압제에 따른 생명력의 위축이 원인이 되었든 궁극적으로 쇠퇴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S 역 104).

즉,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언제나
두 가지 긴장이 함께 균형잡혀 있다..
조화와 일치가 긍정적이라고 한다면
부조화와 어긋남에도 역시 긍정적인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처음 들었을 때는 약간 황당하기도 했었는데..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에서 파악prehension이란 개념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암시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매우 기분 나쁘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니까 파악이 즉, “움켜 쥐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소유'를 의미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재순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화이트헤드가 보는 현실적 존재는
<선택>과 <배제>하기 때문에 존재가 같이 더불어 가야지 왜 배제를 하느냐는 것이다..
이때의 선택과 배제는 화이트헤드에게서 <긍정적 파악>과 <부정적 파악>을 말한 것인데..
그 분은 선택과 배제를 오히려 화이트헤드의 중요 특수 용어로 알고 있었다..

사실 prehension이 “붙잡아 모으다”라는 뜻을 가진 점이 있기에
“움켜 쥐다”로 보는 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즉, 이것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암시한다고 보는 것은
비록 prehension 자체가 이미 ontological fact의 차원의 개념이지만
여기서 곧바로 사회학적 차원의 개념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논의의 범주 차원이 다른 얘기지만, 용어선택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서 prehension의 뜻은 분명하게도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PR)이라고 기술되고 있다..
즉, 그 관계는 붙잡아 모음으로서 관계적 사태를 가지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가치는 사적 소유를 기반한 것이라고 해도..
화이트헤드가 말한 prehension에서는 공공성과 사사성의 구분이 없다고 그 스스로 말한다.

“파악의 이론은 전적으로 공적이거나 전적으로 사적인 그런 구체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학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공공성과 사사성 간의 구별은 이성의 구별이지 상호 배타적인 구체적 사실들 간의 구별은 아니다.”(PR 역 509).

그리고 현실적 존재가 그 결단에 의해 선택과 배제를 하는 것은
존재 자체의 활동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현실에서
도대체 선택과 배제가 없는 존재가 어디 있는가?

셋째는, 화이트헤드의 신이 병을 앓거나 질투를 하거나 그러냐는 것이다..
즉,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인격적 신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현실적 존재다.. 무릇 현실적 존재는 가능태를
받아들임으로서 경험한다.. 다시 말해 경험의 내용은 포착한 가능태다..

그런데 이때 화이트헤드가 보는 신은 세계의 경험을
온전히 그 자신도 맛보는 현실적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조금도 버려지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
세계에서 실현된 모든 가능태들은 신 그 자신도 몽땅 다 체험한다..
신의 결과적 본성이 그거 아닌가..

그렇기에 신이 병을 앓거나 질투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신도 투쟁적인가? 인간이 투쟁적인 한에서 바로 그 경험을 신도 한다..
이 때 신이 세계의 체험을 그 자신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때
신 자신도 병을 앓을 수 있다는 얘기는 지극히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얘기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오늘날 과정신학자들 주류의 입장인 하츠온파의 신관보다
화이트헤드가 보는 신관이 더욱 인격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점이 더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츠온은 신을 파생적 일자인 <사회>로 보지만
화이트헤드에게서는 그 자체로 <단 하나의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봤던 신은 인내어린 시인이요, 모성애적 설득자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 이러한 비판이 하나 더 있다..

이른바 화이트헤드의 삶 자체는 투쟁적인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 자체도 투쟁적이지도 못하며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보는 시각에 대해서다..

물론 계급적으로 따지면 화이트헤드는 중산층 학자에 속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마을에 그 어떤 부조리한 현장이 있다고 하자..
우리나라의 80년대 경우 매우 급박한 시국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거리에 나가서 데모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미래를 준비했던 모든 자들은 죄다 매도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는 짱돌을 던지기도 했었지만, 누구는 이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옷을 입히기도 하고, 심약한 자들은 기도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여기에 적대세력들에 대항할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하는 자도 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서 문명의 정세를 논해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소위 말하는 투쟁적 혹은 그 반대의 반동적 삶을 살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화이트헤드야말로 오히려 그의 사회적 위치에서 볼 때,
문명의 더 큰 영속적 투쟁을 위해 즉, 가장 탄탄한 전략적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씨름한 것이라고 본다.. 사실상 그러한 작업이란 것은
그때까지의 <반합리적 지성들>에 대한 지성적 투쟁이기도 하다..
게다가 말년의 그는 분명한 <평화공존 사상>을 제창하였던 자였다..

그런데 이를 두고서 화이트헤드의 이론은 별볼일 없다고
비난거리로 삼는다면 참으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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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즉, 정당하게 화이트헤드를 넘어서는 법에 대해서다..

솔직히 지금의 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논리적 이론에 대해서는
그 빈틈을 도무지 발견하기가 힘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다.. 즉, 그 사람의 논리적 이론을 이탈하여
그 논리적 이론들을 세계 안에 실제로 적용시켜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봄으로써 오류와 부작용이 생긴다면 이는 필시
화이트헤드가 놓쳤던 그 어떤 <결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본다..
나 개인적으로는 바로 그것을 찾고 싶은 사람이다..
이론과 실제의 적용에서 그를 넘어서고 싶은 것이다..

그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 그를 넘는다는 것은 매우 우스운 얘기잖은가..
화이트헤드 사상을 대충 수박 겉핥기식의 이해에 기반하여
그를 비판적으로 극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잖은가..
너무나도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이용상 : 창조성, 다, 일, 영원적객체, 신, 현실적존재, 합생, 대비, 명제, 모험... 오류의 발견은 주자의 할연관통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하네요. 好惡에 출렁이는 일상을 백두의 체계에 집어넣어 광속으로 처리하기는 아직 난망.    
[ 2006-01-20 23:36:37 ]

미선이 : 이제 봤네여.. 잘 지내시져?^^ 이용상님의 얘긴 주자의 할연관통과 관련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 싶네여..    
[ 2006-03-25 16:26:20 ]